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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2013

On a pour femelle une pissotière et on en vit (Dans Une Histoire De L'art Du XXe siècle)

La Fontaine
R. Mutt (Marcel DUCHAMP)
Photo : Wikipedia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Fontaine_Duchamp.jpg)



On a pour femelle une pissotière et on en vit

“Que monsieur Mutt ait fabriqué la fontaine de ses propres mains ou non est sans importance. Il l’a CHOISIE. Il a pris un objet de la vie quotidienne, l’a mis en situation au point de faire oublier sa fonction et sa signification utilitaires sous un nouveau titre et en nouveau point de vue - et a créé une pensée nouvelle de cet objet” Ainsi s’exprime l’éditorialiste du second numéro de la revue The Blind Man, probablement Duchamp lui-même. Il y a bien un “cas Richard Mutt” puisque la presse en parle et que l’objet du délit a été photographié par Alfred Stieglitz dont la personnalité, en tant que protagoniste de l’art moderne aux Etats-unis, est le gage du sérieux de l’affaire. L’envoi, cependant, n’aurait pas dû prêter à conséquence. La société des Artistes indépendants s’interdit la censure et prône l’admission libre. La Fontaine de M. Mutt est pourtant refusée, prenant ainsi à son propre piège le comité organisateur. L’objet, croit-on, n’a pas choqué mais le nom de l’auteur qui signifié “imbécile”, “bâtard”, a sans doute laissé perplexe. Duchamp, en guise de protestation, donne sa démission du comité. Il ne peut accepter qu’on refuse “au nom de la loi” ce que lui-même, insidieusement, a expédié “ au nom de l’art”. Ici commence la fortune critique du paradigme sans doute le plus singulier des avant-gardes.

- On a pour femelle une pissotière et on en vie, Une histoire de l’art du XXe siècle par Bernard Blistène, 2009, pp. 53, BEAUX-ARTS édition.


여기에 암컷을 위한 소변기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있다.

“뒤샹이 La fontaine 을 직접 만들었는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하였다. 그는 일상속의 하나의 물건을 가지고 왔고, 새로운 제목과 그것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여 그 물건이 지닌 기능과 그것에 대한 상징을 잊어버리게 하였으며, 이 물건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창조해 내었다.”

이처럼 The Blind Man 저널의 논설위원은 설명하였고, 아마도 뒤샹 자신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것이다. 언론에서 그것을 이슈화하고 미국의 현대미술의 주역인 Alfred Stieglitz 에 의하여 그 부정적인 물건이 사진찍힘으로써 “Richard Mutt의 작품” 은 행위의 중요성의 증거로 자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작품은 그 작품이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준비할 수는 없었다. 물론, 자유 예술가들의 사회에서는 검열을 금기하였고 자유로운 표현에 대한 허용을 권장하였다. 하지만 뒤샹의 La Fontaine 은 조직 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도 거절당했다. 예술품이라 믿을 수 있는 이 물건은 큰 충격은 아니었으나, “멍청이”, “잡종”등을 의미하는 작가의 이름은 당연히도 난처한 문제로 남았다. 뒤샹은 그것에 대한 저항으로 위원회에서의 사직을 전달했다. 그는 그 스스로도 “법적인 이름” 을 거절당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기만적으로, “예술적인 이름” 으로 처리해버렸다. 여기에서 단연코 아방가르드에서 제일 특별한 페러다임의 결정적인 기회가 시작되었다.  

- On a pour femelle une pissotière et on en vie, Une histoire de l’art du XXe siècle par Bernard Blistène, 2009, pp. 53, BEAUX-ARTS é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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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2013

L'œuvre copiée de Ferry at Varenne-Saint-Hilaire(Camille Pissarro)

L'œuvre copiée de Ferry at Varenne-Saint-Hilaire
Chatviolet Soleil(임 태양), 2013
La peinture acrylique(아크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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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2013

La Table(책상)
Chatviolet Soleil(임 태양), 2013
Huile sur toile(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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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cher Du Soleil(일몰)
Chatviolet Soleil(임 태양), 2012
Huile sur toile(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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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2013

사복이 말을 못하다 (삼국유사 중)

사복이 말을 못하다. 임태양. 2012. 유화. 
Sabok ne peut pas dire. Chatviolet Soleil. 2012. Huile sur Toile.


"사복이 말을 못하다 (삼국유사 중)

  서울의 만선북이에 사는 한 과부가 남편 없이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열두 살이 되도록 말도 못 하고 일어서지도 못 해 사동이라 불렀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때 원효는 고선사에 머물고 있었다. 원효가 사복을 보고 맞이하여 예를 올렸으나, 사복은 답례를 하지 않고 말했다.
  "옛날 그대와 내가 함께 불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지금 죽었는데 나와 함께 장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좋다,"
  그래서 함께 (사복의) 집에 갔다. 사복은 원효에게 포살수계를 해 달라고 했다. 원효는 시신 앞으로 가서 빌었다.
  "태어나지 말지니, 죽는 것이 괴롭구나. 죽지 말지니, 태어나는 것이 괴롭구나."
  사복이 말했다.
  "말이 번거롭다."
  그래서 원효가 다시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이 괴롭구나."
  두 사람은 상여를 메고 활리산 동쪽 기슭으로 갔다. 원효가 말했다.
  "지혜로운 호랑이를 지혜의 숲 속에 장사 지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사복이 곧 게를 지어 말했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라수 사이에서 열반에 드셨도다. 지금 또한 그러한 자가 있어, 연화장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네."
  말을 마치고 띠풀의 줄기를 뽑으니, 아래에 밝고 청허한 세계가 있었는데, 칠보난간에 누각이 장엄하여 아마도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 사복이 시체를 업고 땅속으로 함께 들어가니 땅이 다시 합쳐졌다. 원효는 곧 돌아왔다. 후세 사람들이 그를 위해서 금강산 동남쪽에 절을 짓고 도량사라 했으며, 매년 3월 14일이면 점찰회를 행하는 것을 일반 규정으로 여겼다. 사복이 세상에 영험을 드러낸 것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그런데 항간에서는 황당한 것을 덧붙이고 있으니 우수운 일이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깊은 못처럼 잠자는 용이 어찌 등한하랴.
  떠나면서 읊은 한 곡 간단하기도 하다.
  고달프구나. 생사는 본래 고통만은 아니니
  연화장 떠도는 (극락) 세계는 넓기도 하네.

- 사복이 말을 못하다, 삼국유사, 일연, 옮긴이 김원중, 2008, (주)믿음사, 서울 "

  이 그림은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사복이 말을 못하다" 편을 컨셉으로 그린 작품이다. 인간의 삶은 어째서 괴로운가에 대해 이 글은 인간의 삶과 죽음 모두 원래부터 괴로운 일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누구나 다 괴롭다. 이는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다. 

  인간은 본인의 의지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나는건 그 부모의 의지이지, 그 본인 스스로의 의지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본인이 원하지 않던 삶 속에서 살아남고자 고통스러워 한다. 이러한 순환과정 속에서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어째서 삶은 고통스러운가?"

  이 그림은 그러한 질문을 마찬가지로 관객들에게 던져본다. 그림에서는 삶의 시작과 죽음이 같이 부둥켜 안고 있다. 삶과 죽음은 이렇게 같이 맞물려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이라는 점에서 이 둘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과연 "삶은 원래가 고통스러운거야"라는 당위성 섞인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조용히 질문해본다.

3/11/2012

L'absent


L’absent

Absence. Tout épisode de langage qui met en scène l’absence de l’objet aimé - quelle qu’en soient la cour et la durée - en tend à transformer cette absence en épreuve d’abandon.

부재. 어떤 이유 혹은 기간 동안의 소중한 존재의, 포기의 시련으로 형태가 바뀌는 부재의 장면을 그린 이야기. 



1. Beaucoup de lieder, de mélodies, de chansons sur l’absence amoureuse. Et, cependant, cette figure classique, dans Werther, on ne la trouve pas. La raison en est très simple : ici, l’objet aimé (Charlotte) ne bouge pas ; c’est le sujet amoureux (Werther) qui, à un certain moment, s’éloigne. Or, il n’y a d’absent que de l’autre : c’est l’autre qui part, c’est moi qui reste. L’autre est en état de perpétuel départ, de voyage ; il est, par vocation, migrateur, fuyant ; je suis, moi qui aime, par vocation inverse, sédentaire, immobile, à disposition, en attente, tassé sur place, en souffrance, comme un paquet dans un coin perdu de gare. L’absence amoureuse va seulement dans un sens, et ne peut se dire qu’à partir de qui reste - en non de qui part : je, toujours présent, ne se constitue qu’en face de toi, sans cesse absent. Dire l’absence, c’est d’emblée poser que la place du sujet et la place de l’autre ne peuvent permuter ; c’est dire : “ Je suis moins aimé que je n’aime”
    1. 연인의 부재를 노래하는 수많은 가사, 멜로디, 노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 양식은 Werther 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여기에 있는 사랑에 빠진 대상(charlotte)은 움직이지 않고, 사랑의 대상(Werther)은 언젠가 떠난다. 이 이외에 다른 종류의 부재는 없다. 다른 누군가가 떠난다면, 내가 남는 것이다. 그리고 그 떠난 존재는 영원히 떠난 상황이다. 여행자, 그는 떠돌이 혹은 도망자의 속성을 띈다. 나(사랑에 빠져있는 대상인)는 반대로, 지금의 장소에서 이동하지 않는, 기다리는, 무너진 혹은 참는... 마치 역에 버려진 동전 가운데의 상자와 같은 상태이다. 사랑의 부재는 오직 감정으로 가고, 그리고 누가 떠난것인지, 누가 남겨진 것인지는 이야기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언제나 현재형인)는 부재가 끝나지 않고서는 너의 앞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재에 대해 이야기 하는것, 그것은 주체의 위치와 객체의 위치가 바뀔수 없음을 단숨에 설명한다. 말하자면, “ 나는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적게 사랑받았다.”


      2. Historiquement, le discours de l’absence est tenu par la Femme : la Femme est sédentaire, l’homme est chasseur, voyageur; la Femme est fidèle (elle attend), l’Homme est coureur (il navigue, il drague). C’est la Femme qui donne forme à l’absence, en élabore la fiction, car elle en a le temps; elle tisse et elle chante; les Fileuses, les Chansons de toile disent à la fois l’immobilité (par le ronron du Rouet) et l’absence (au loin, des rythme de voyage, houles marine, chevauchées). Il s’ensuit que dans tout homme qui parle l'absence de l'autre, du féminin se déclare : cet homme qui attend et qui en souffre, est miraculeusement féminisé. Un homme n’est pas féminisé parce qu’il est inverti, mais parce qu’il est amoureux. (Mythe et utopie : l’origine a appartenu, l’avenir appartiendra aux sujet en qui il y a du féminin)

      2. 역사적으로 부재에 대한 이야기는 여성들의 몫이었다. 여성들은 한 곳에 머물러 있었고, 남자들은 사냥꾼, 혹은 여행객이었다. 여성들은 참고 기다렸고, 남자들은 항해하거나, 환심을 사려 하며 떠나갔다. 부재에 대해서 양식화 시키고, 가상의 사실에 대하여 심사숙고 하는것은 여성의 몫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배를 짜고, 노래를 하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방직공, Les chansons de toile 은 간혹 부동성(Rouet의 민요)과 부재(멀리 떠나는 여행의 리듬, 파도의 일렁거림, 말타기)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다른이(여성)의 부재를 이야기 하는 모든 남성에 대한 규정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기다리고 인내하는 남성들은 기적적으로 여성화 된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반대되기 때문에 남자들은 여성성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을 보인다. (신화와 낙원 : 기원은 속하여 있고, 미래는 여성적인 것과 연관된 것이 주제들인 것에 속하게 될것이다.)



      3. Quelquefois, il m’arrive de bien supporter l’absence. Je suis alors “normal” : je m’aligne sur la façon dont “tout le monde” supporter le départ d’une “personne chère” ; j’obéis avec compétence au dressage par lequel on m’a donné très tôt l’habitude d’être séparé de ma mère - ce qui ne laissa pas, pourtant, à l’origine, d’être douloureux (pour ne pas dire : affolant). j’agis en sujet bien sevré; je sais me nourrir, en attendant, d’autres choses que du sein maternel. 
      Cette absence bien supportée, elle n’est rien d’autre que l’oubli. Je suis, par intermittence, infidèle. C’est la condition de ma servie; car, si je n’oubliais pas, je mourrais. L’amoureux qui n’oublie pas quelquefois, meurt par excès, fatigue et tension de mémoire (tel Werther). 
      (Enfance, je n’oubliais pas : journées interminables, journées abandonnées, où la Mère travaillait loin; j’allais, le soir, attendre son retour à l’arrêt de l’autobus Ubis, à Sèvres-Babylone ; les autobus passaient plusieurs fois de suite, elle n’était dans aucun.)

      3. 때때로, 그는 나는 부재에 대하여 잘 인내하게 한다. 나는 마찬가지로 “정상”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소종한 존재의 떠남에 대해 참아내고, 나 역시도 그러한 태도를 따라간다. 곁에 머물러주지 않았던, 그러나 근본적으로 고통스러웠던 어머니와의 떨어짐이 너무 일찍 습관화 되었고, 이러한 것에 대한 불안함을 말할 수 없도록 한 그러한 길들이기에 순종하였다. 내가 젖먹이 인 것을 알지만, 다른측면에서는 어머니의 품을 기다리는 것에서 떨어져나오는 작업을 훌륭하게 해내었다. 
      이러하게 잘 견뎌낼 수 있는 부재라고 해도, 그것은 망각될 수 있는 다른 어떠한 것이 아니다. 나는 가끔씩 불신한다. 이러한 상태는 내가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잊어버리지 못한다면, 나는 죽을것이었기 때문이다. Werther와 같이 가끔씩 사랑하는 연인을 잊을수 없는 사람은 피로와 기억에 대한 긴장의 초과분에 의해 죽는다.
      (어릴적, 나는 잊어버릴 수 없는 일이 있다. 끝없이 긴, 내버려 졌던 하루... 그날, 어머니는 먼 곳에서 일하고 계셨고, 나는 버스정류장에서 어머니의 귀가를 기다렸다. 버스는 수없이 지나갔지만, 그 안에 어머니는 안계셨다.)



      4. De cette oubli, très vite, je me réveille. Hâtivement, je mets en place une mémoire, un désarroi. Un mot (classique) vient du corps, qui dir l’émotion d’absence : soupirer : “soupirer après la présence corporelle” : les deux moitié de l’androgyne soupirent l’une après l’autre, comme si chaque souffle, incomplet, voulait se mêler à l’autre : image de l’embrassement, en tant qu’il fond les deux images en une seule : dans l’absence amoureuse, je suis, tristement, une image décollée, qui sèche, jaunit, se recroqueville.
      (Quoi, le désir n’est-il pas toujours le même, que l’objet soit présent ou absent ? L’objet n’est-il pas toujours absent ? - Ce n’est pas la même langueur : il y a deux mots : Pothos, pour le désir de l’être absent, et Himéros, plus brûlant, pour le désir de l’être présent.)

      4. “한숨짓다(예로 들자면 떠난 뒤에 한숨짓다라는 상황에서의)”라는 단어는 “부재”에 대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성별이 다른 두개의 존재는 마치 각각의 숨쉬듯 연관되어 지길 원하는, 다른 존재에게 완성되어지지 않은, 마치 키스하는 장면과 같은 한숨을 짓는다. 연인의 부재와 같이 둘에서 하나가 될 때, 나는 슬프게도 하나의 뜯겨지고, 메마르고, 노랗게 변색되고, 움츠려든 이미지가 된다. 나는 이런 망각에서 서둘러 깨어나 혼잡함과 기억을 성급하게 자리잡는다.
      (대상이 현존하고 있든 부재하고 있는 대한 욕망은 언제나 같지 않은가? 대상은 언제나 부재중이지 않은가? - 아니다. 같지 않다. 여기에는 두가지 단어가 있다. 첫번째로 Pothos는 부재하는 존재에 대한 욕망이고, 두번째인 Himéros는  Pothos보다 좀 더 강한, 현재있는 존재에 대한 욕망이다.)



      5. Je tiens sans fin à l’absent le discours de son absence ; situation en somme inouïe; l’autre est absent comme référent, présent comme allocutaire. De cette distorsion singulière, naît une sorte de présent insoutenable ; je suis coincé entre deux temps, le temps de la référence et le temps de l’allocution : tu es parti (de quoi je me plain), tu es là (puisque je m’adresse à toi). Je sais alors ce qu’est le présent, ce temps difficile : un pur morceau d’angoisse.
      L’absence dure, il me faut la supporter. je vais donc la manipuler : transformer la distorsion du temps en va-et-vient, produire du rythme, ouvrir la scène du langage (le langage naît de l’absence : l’enfant s’est bricolé une bobine, la lance et la rattrape, mimant le départ et le retour de la mère : un paradigme est crée). L’absence devient une pratique active, un affairement (qui m’empêche de rien faire d’autre); il y a création d’une fiction aux rôles multiples (doutes, reproches; désirs, mélancolies). Cette mise en scène langagière éloigne la mort et l’autre : un moment très bref; dit-on, sépare le temps où l’enfant croit encore sa mère absente et celui où il la croit déjà morte. Manipuler l’absence, c’est allonger ce moment, retarder aussi longtemps que possible l’instant où l’autre pourrait basculer sèchement de l’absence dans la mort.

      5. 나는 다른 이가 계속 부재중인, 하지만 마치 현재 대화를 듣고 있는것 같은, 종합적으로 놀라운 상황에 대한 대화를 부재의 끈임없이 계속 하고있다. 나는, 이 인정할 수 없는 현실에서 태어난 이러한 하나의 비틀림과 같은, 기준이 되는 시간(“너(나를 슬프게 하는 무엇)”는 떠났다)과 담화의 시간(“너(나의 마음을 사로잡은)”는 여기에 있다),  이 두 가지 시간 사이에서 벗어 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지금이 순수한 불안의 조각같은 힘든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이 계속되는 부재를 견뎌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상황을 가공할 것이다. 떠남과 돌아옴에 대한 시간의 뒤틀림을 바꾸고, 리듬을 만들어내고, 언어로 장면을 연출할 것이다. (언어는 부재에서 태어난다. 예를 들자면, 아이들은 그들의 실감개를 던지고 다지 잡으며 어머니의 떠남과 돌아옴에 대한 이야기를 꾸며낸다. 그렇게 언어의 계열이 탄생한다.) 그렇게 부재는 나에게 다른 것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분주하고 활동적인 실제경험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의심, 비난, 욕망, 우울과 같은 다양한 역할에 관한 가상역할의 창조로 이어진다. 이러한 언어적 장면은 죽음과 다른 매우 요약된 순간들을 떨어뜨려 놓는다. 다시 말하자면, 아이가 어머니의 부재중이라고 믿는 순간과 아이가 어머니가 이미 죽었다고 믿는 순간을 분별하여 준다. 부재를 판별하는 것, 그것은 부재의 시간을 늘리는 것이고, 다른 측면으로는 다른 존재를 죽음으로 인한 부재에 메르게 동요 했었어야 했을 순간을 오랫동안 늦추는 것이다.



      6. La frustration aurait pour figure la Présence (je vois chaque jour l'autre, et pourtant je n'en suis pas comblé : l'objet est là, réellement, mais il continue à me manquer, imaginairement). La castration, elle, aurait pour figure l'intermittence (j'accepte de quitter un peu l'autre, "sans pleurer", j'assume le deuil de la relation, je sais oublier). L'Absence est la figure de la privation ; tout à la fois, je désire et j'ai besoin. La désir s'écrase sur le besoin : c'est là le fait obsédant du sentiment amoureux.
      (" le désir est là, ardent, éternel : mais Dieu est plus haut que lui, et les bras du désir n'atteignent jamais la plénitude adorée." Le discours de l'absence est un texte à deux idéogramme : il y a les bras levés du Désir, et il y a les bras tendus du Besoin. J'oscille, je vacille entre l'image phallique des bras levés et l'image pouponnière des bras tendus.)

      6. 실망은 현재형일 것이다. (나는 다른 존재를 매일 보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곳에 있지만, 그 대상을 그리워하는 상상속에서 계속된다.) 성적 정체성 상실은 일시적일 것이다. ( 나는 다른존재의 일시적 떠남을 울음없이 허용한다. 왜냐하면 나는 관계속에서의 슬픔을 안고있고, 잊어버림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재는 결핍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욕망하고, 필요해한다. 욕망은 결핍위에 짓이겨진다. 이것은 사랑하는 감정에 의한 끈임없는 괴로움의 결과같은 것이다.
      ("욕망이란, 영원히 불타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욕망보다 높은 곳에 있고, 들어올린 욕망의 팔을 그가 열망하는 완전함에 도달할 수 없다." 부재에 관한 이야기는 두개의 뜻을 가진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있다. 그 두가지 뜻은 들어올린 욕망의 팔과, 부족함을 잡아당기는 팔이다. 나는 성숙된 남성적 이미지를 가진 들어올린 팔과, 유아적인 이미지를 가진 잡아당기는 팔 사이에서 주저하고, 동요한다.)



      7. Je m'installe seul, dans un café ; on vient m'y saluer ; je me sens entouré, demandé, flatté. Mais l'autre est absent; je le convoque en moi-même pour qu'il me retienne au bord de cette complaisance mondaine, qui me guette. J'en appelle à sa "vérité" (la vérité dont il me donne la sensation) contre l'hystérie de séduction où je me sens glisser. Je rends l'absence de l'autre responsable de ma mondanité : j'invoque sa protection, son retour : que l'autre apparaisse, qu'il me retire, telle une mère qui vient chercher son enfant, de la brillance mondaine, de l'infatuation sociale, qu'il me rende " l'intimité religieuse, la gravité" du monde amoureux.
      (X... me disait que l'amour l'avait protégé de la mondanité : coteries, ambitions, promotions, manigances, alliances, sécessions, rôles, pouvoir : l'amour avait fait de lui un déchet social, ce dont il se réjouissait.)

      7. 까페에 홀로 머무른다. 나를 맞이하여 온다. 둘러싸인듯한, 무언가를 요구하는, 그리고 아첨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 외에 다른것은 없다. 나를 감시하는 사교적인 호의 앞에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미끄러져 버리는 듯한 유혹의 히스테리에 대조되는 그의 "진실(나에게 감각을 주는 진실)"을 부른다. 나는 나의 사교생활에서 책임져야 하는 존재를 부재로 남겨놓는다. 다른존재가 나타나는것, 사교적인 화려함과 사회적인 자기만족을 세계에서 마치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찾아가듯 나를 꺼내가는것, 나를 연인들의 세계의 종교적으로 내면성과 중력에 남겨놓는 것과 같은 그의 보호와 그의 귀환을 기원한다. 
      (X 는 나에게 사랑은 도당, 욕망, 장려, 음모, 연합, 이탈, 역할, 권력같은 사교적인 세계로부터 그를 지켜주지만, 그를 즐겁게 하는 것과 같은 사회적인 손실을 준다고 이야기 했었다.)



      8. Un koan bouddhique fit ceci : "Le maître tient la tête du disciple sous l'eau, longtemps, longtemps ; peu à peu les bulles se raréfient; au dernier moment, le maître sort le disciple, le ranime : quand tu auras désiré la vérité comme tu as désiré l'air, alors tu sauras ce qu'elle est."
      L'absence de l'autre me tient la tête sous l'eau; peu à peu, j'étouffe, mon air se raréfie : c'est par cette  asphyxie que je reconstitue ma "vérité" et que je prépare l'Intraitable de l'amour

      8. 불교경전에서 이것을 이야기한다. "스승은 제자의 머리를 물속에 오랫동안 담근다. 조금씩 공기방울이 줄어든다. 마지막순간에 스승은 제자를 물에서 꺼내주며 이야기한다. 네가 공기를 원하듯이 진리를 원한다면, 너는 그것을 알게 될것이다," 
      다른 존재의 부재는 내 머리를 물속에 담근다. 점차 숨이 가파온다. 이렇게 숨이 가파오는 것은 나의 진실의 재건축과 조절하기 힘든 사랑을 준비함에 의한 것이다.



      - L'absent, Fragment d'un discours amoureux

      1/12/2012

      La plainte


      Si j'ai écrit le texte par la langue française, c'est-à-dire que je ne veux pas annoncer ce texte à la personne d'entreprise ou ma famille. Certe, ils ne peuvent pas dire et comprendre la langue française, donc, je peux dire mon histoire très franche par la langue française. s'ils utilisent la traduction de Google? je ne sais pas. Tant pis.

      Maintenant, ma vie est très nul. pourquoi? moi aussi, je suis en train d'essayer à rechercher la réponse de ce problème. Il y a beaucoup de possibilité, or, cette occasion est plus vraie que des autres.
      Pendant, ma vie est plait. C'est-à-dire qu'il n'y a aucune issue. Le travail est ennuyé et sans intéressé. Pour étudier et travailler, j'ai sacrifié mon loisir. je ne peux pas rendez-vous avec mes amis, en plus, si je rencontrais mes amis, la discussion est aussi nul en cas de le sujet que nous racontons est complètement différent entre nous. Quand j'habitais en France, j'étais heureux, parce que nous nous discutions le même sujet : la langue française, l'art et l'avenir. Maintenant, quand les gens d'autour moi me dire quelque chose, le sujet est toujours la série, les gens célébrés ou la type du sang(C'est vraiment bizarre). ils ne intéressent pas l'art, la philosophie, l'histoire et l'avenir. La Corée, il n'y a aucune espoir pour moi.

      La solution? Il y a une seule réponse. il faut rentrer en France. Donc, je dois supporter après deux ans, sinon, j'irai en France sans pensée. j'ai déjà acheté le ticket d'avion, donc, ce n'est pas la question. Héras, je ne sais pas comment je fer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