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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2013

On a pour femelle une pissotière et on en vit (Dans Une Histoire De L'art Du XXe siècle)

La Fontaine
R. Mutt (Marcel DUCHAMP)
Photo : Wikipedia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Fontaine_Duchamp.jpg)



On a pour femelle une pissotière et on en vit

“Que monsieur Mutt ait fabriqué la fontaine de ses propres mains ou non est sans importance. Il l’a CHOISIE. Il a pris un objet de la vie quotidienne, l’a mis en situation au point de faire oublier sa fonction et sa signification utilitaires sous un nouveau titre et en nouveau point de vue - et a créé une pensée nouvelle de cet objet” Ainsi s’exprime l’éditorialiste du second numéro de la revue The Blind Man, probablement Duchamp lui-même. Il y a bien un “cas Richard Mutt” puisque la presse en parle et que l’objet du délit a été photographié par Alfred Stieglitz dont la personnalité, en tant que protagoniste de l’art moderne aux Etats-unis, est le gage du sérieux de l’affaire. L’envoi, cependant, n’aurait pas dû prêter à conséquence. La société des Artistes indépendants s’interdit la censure et prône l’admission libre. La Fontaine de M. Mutt est pourtant refusée, prenant ainsi à son propre piège le comité organisateur. L’objet, croit-on, n’a pas choqué mais le nom de l’auteur qui signifié “imbécile”, “bâtard”, a sans doute laissé perplexe. Duchamp, en guise de protestation, donne sa démission du comité. Il ne peut accepter qu’on refuse “au nom de la loi” ce que lui-même, insidieusement, a expédié “ au nom de l’art”. Ici commence la fortune critique du paradigme sans doute le plus singulier des avant-gardes.

- On a pour femelle une pissotière et on en vie, Une histoire de l’art du XXe siècle par Bernard Blistène, 2009, pp. 53, BEAUX-ARTS édition.


여기에 암컷을 위한 소변기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있다.

“뒤샹이 La fontaine 을 직접 만들었는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하였다. 그는 일상속의 하나의 물건을 가지고 왔고, 새로운 제목과 그것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여 그 물건이 지닌 기능과 그것에 대한 상징을 잊어버리게 하였으며, 이 물건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창조해 내었다.”

이처럼 The Blind Man 저널의 논설위원은 설명하였고, 아마도 뒤샹 자신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것이다. 언론에서 그것을 이슈화하고 미국의 현대미술의 주역인 Alfred Stieglitz 에 의하여 그 부정적인 물건이 사진찍힘으로써 “Richard Mutt의 작품” 은 행위의 중요성의 증거로 자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작품은 그 작품이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준비할 수는 없었다. 물론, 자유 예술가들의 사회에서는 검열을 금기하였고 자유로운 표현에 대한 허용을 권장하였다. 하지만 뒤샹의 La Fontaine 은 조직 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도 거절당했다. 예술품이라 믿을 수 있는 이 물건은 큰 충격은 아니었으나, “멍청이”, “잡종”등을 의미하는 작가의 이름은 당연히도 난처한 문제로 남았다. 뒤샹은 그것에 대한 저항으로 위원회에서의 사직을 전달했다. 그는 그 스스로도 “법적인 이름” 을 거절당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기만적으로, “예술적인 이름” 으로 처리해버렸다. 여기에서 단연코 아방가르드에서 제일 특별한 페러다임의 결정적인 기회가 시작되었다.  

- On a pour femelle une pissotière et on en vie, Une histoire de l’art du XXe siècle par Bernard Blistène, 2009, pp. 53, BEAUX-ARTS é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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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2013

L'œuvre copiée de Ferry at Varenne-Saint-Hilaire(Camille Pissarro)

L'œuvre copiée de Ferry at Varenne-Saint-Hilaire
Chatviolet Soleil(임 태양), 2013
La peinture acrylique(아크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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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2013

La Table(책상)
Chatviolet Soleil(임 태양), 2013
Huile sur toile(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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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cher Du Soleil(일몰)
Chatviolet Soleil(임 태양), 2012
Huile sur toile(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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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2013

사복이 말을 못하다 (삼국유사 중)

사복이 말을 못하다. 임태양. 2012. 유화. 
Sabok ne peut pas dire. Chatviolet Soleil. 2012. Huile sur Toile.


"사복이 말을 못하다 (삼국유사 중)

  서울의 만선북이에 사는 한 과부가 남편 없이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열두 살이 되도록 말도 못 하고 일어서지도 못 해 사동이라 불렀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때 원효는 고선사에 머물고 있었다. 원효가 사복을 보고 맞이하여 예를 올렸으나, 사복은 답례를 하지 않고 말했다.
  "옛날 그대와 내가 함께 불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지금 죽었는데 나와 함께 장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좋다,"
  그래서 함께 (사복의) 집에 갔다. 사복은 원효에게 포살수계를 해 달라고 했다. 원효는 시신 앞으로 가서 빌었다.
  "태어나지 말지니, 죽는 것이 괴롭구나. 죽지 말지니, 태어나는 것이 괴롭구나."
  사복이 말했다.
  "말이 번거롭다."
  그래서 원효가 다시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이 괴롭구나."
  두 사람은 상여를 메고 활리산 동쪽 기슭으로 갔다. 원효가 말했다.
  "지혜로운 호랑이를 지혜의 숲 속에 장사 지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사복이 곧 게를 지어 말했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라수 사이에서 열반에 드셨도다. 지금 또한 그러한 자가 있어, 연화장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네."
  말을 마치고 띠풀의 줄기를 뽑으니, 아래에 밝고 청허한 세계가 있었는데, 칠보난간에 누각이 장엄하여 아마도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 사복이 시체를 업고 땅속으로 함께 들어가니 땅이 다시 합쳐졌다. 원효는 곧 돌아왔다. 후세 사람들이 그를 위해서 금강산 동남쪽에 절을 짓고 도량사라 했으며, 매년 3월 14일이면 점찰회를 행하는 것을 일반 규정으로 여겼다. 사복이 세상에 영험을 드러낸 것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그런데 항간에서는 황당한 것을 덧붙이고 있으니 우수운 일이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깊은 못처럼 잠자는 용이 어찌 등한하랴.
  떠나면서 읊은 한 곡 간단하기도 하다.
  고달프구나. 생사는 본래 고통만은 아니니
  연화장 떠도는 (극락) 세계는 넓기도 하네.

- 사복이 말을 못하다, 삼국유사, 일연, 옮긴이 김원중, 2008, (주)믿음사, 서울 "

  이 그림은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사복이 말을 못하다" 편을 컨셉으로 그린 작품이다. 인간의 삶은 어째서 괴로운가에 대해 이 글은 인간의 삶과 죽음 모두 원래부터 괴로운 일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누구나 다 괴롭다. 이는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다. 

  인간은 본인의 의지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나는건 그 부모의 의지이지, 그 본인 스스로의 의지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본인이 원하지 않던 삶 속에서 살아남고자 고통스러워 한다. 이러한 순환과정 속에서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어째서 삶은 고통스러운가?"

  이 그림은 그러한 질문을 마찬가지로 관객들에게 던져본다. 그림에서는 삶의 시작과 죽음이 같이 부둥켜 안고 있다. 삶과 죽음은 이렇게 같이 맞물려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이라는 점에서 이 둘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과연 "삶은 원래가 고통스러운거야"라는 당위성 섞인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조용히 질문해본다.